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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그는 Badenwuertemberg 주에서 5번째로 큰 인구 약 20만명의 중소도시이지만 역사가들은 유럽최초의
인류가 정착한 곳으로 보고있다. 그 앞산에 약 50만년전 호모 하이델베르겐스의 유적이 발굴되었기때문.
좌로는 라인강이 흐르고, 시를 네카어강이 통과하며 주위에 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저 있어 동양의 풍수지리학적으로도
살기좋은 곳임에 틀림없다. 이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낭만적이라고 평가하는 하이델베르크 고성이 언덕위에 자리하고
있고, 성 정원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는 바로크풍의 구 도시와 강들은 그 로맨틱함을 더한다.
고 문서에 “1196년 Heidelberch” 라는 이름이 나타난다.
12세기 중반 호헨슈타우펜 가문에서 황제 프리드리히 바바로사는 이복동생 콘라드 공작에게 팔츠 지역을
할양해주었고 그는 이곳에 성을 짓고 통치기반을 갖추고서 팔츠 일대를 통치하기 시작했지만 육십년 후
1200년대 초에 이르러 대가 끊기면서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Bayern 통치자 비텔스바흐 가문의 루드비히 1세에게
팔츠 영토를 할양해 준다.
1300년대 중반에는 황제 카를 4세의 금인칙서 발표로 팔츠 군주는 선제후로 격상되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할 수 있게 되었다.
1610년대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는 보헤미안 여왕 엘리자베스 비를 위해 그녀몰래 하루만에 그녀의 고향 집에
있는 문과 똑같은 문을 만들고 문 뒤로 성 정원도 건설하는등 친 보헤미안 행보를 이어갔으며, 마침 새 왕이 추천되어.
보헤미아의 개신교 대신들은 그동안 구교쪽 왕으로부터 염증이 나서 신교출신을 왕으로 삼고자 프리드리히 5세를
옹립하고 구교쪽 왕으로 임명되어 파견한 특사를 창밖으로 던지는 등 구교세력과 본격적인 권력투쟁을 시작,
결국 30년 종교전쟁이 발화된다.
이리하여 1620년 구교의 틸리 장군이 바이에른을 중심으로 구교군을 결성하여 하이델베르크를 처들어와서
프리드리히 5세를 축출하고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가 팔츠의 선제후 자리도 차지한다.
이후 1630년대 신교측의 대반격이 진행되는데 즉 스웨덴 왕 구스타보가 신교군을 이끌고 와서
하이델베르크를 재탈환한다. 이후로도 몇번의 공방전으로 주인이 계속 바뀌었고 성과 도시는 더욱 파괴되었으며
마침내 1635년에는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이곳에서의 종교전쟁은 일단락 되었고 새 주인으로 프리드리히 5세의
아들 카를 루드비히로 하는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는 파괴된 성을 재건해서 1600년 중반에야 입성할 수 있었지만
얼마 못가서 그의 대는 또 끊기게 되었고 프랑스 부르봉왕조 태양왕 루이 14세는 오를레앙 여작 엘리자베스 샬롯데에게
상속권이 있다고 주장하며 받아들여지지 않자 군사를 이끌고 처들어온다.
1689의 침공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듬해 재 정비해서 3년간 공격을 퍼붓고 도시는 쑥대밭이 된 후로는 성안 주민들도
항복하고 드디어 성에 진입 3년간의 공격에도 파괴하지 못했던 성벽과 성탑을 화약으로 폭발시켜 페허성을 만든다.
1720년대에는 카를 필립 선제후는 하이델베르크에서 가까운 만하임에다가 바로크 양식으로 왕궁을 건설하고
정부를 옮긴다
한편 하이델베르크 성 지하에는 큰 술통이 유명하다. 이 술통 밑에는 페르케오라는 광대의 목상이 있는데 카를 필립이
술 창고를 지키라고 임명했는데 그는 매일 18리터의 포도주를 15년간 몰래 빼 마셨다한다.
의사는 그가 80세때 건강이 매우 위험하니 술을 끊으라 했는데 그 다음날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1750년대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는 하이델베르크 성과 도시를 재건하려 했고 또 파괴된 다리도 재건해서 카를대교 라고명명했다.
그는 팔츠정부를 만하임에서 다시 하이델베르크로 옮길 계획이었으나 1764년 낙뢰로 다시 파괴, 하이델베르크 시민들이
파괴된 성의 돌들을 훔처가서 자신의 집을 짓는데 사용하기도 해서 천도는 아예 포기하고 그도 파괴된 성의 돌들과
목제들을 근처 슈벳칭겐에 성을 짓는데 사용한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성 지하에다 세계에서 가장 큰 술통 (8.5m x 7m 높이, 22만 리터) 을 추가로 만들어 세금으로
걷어들인 술을 저장하게 했다.
1777년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에서 마지막 자손인 Max Joseph 3세가 후손없이 급사하여 바이에른의 대가 끊기자
가장 가까운 상속자로 천거되어 Bayern 과 팔츠 양쪽모두의 선제후가 되었고 만하임에서 뮌헨으로 자신의 통치권좌를
옮긴다. 이때 프랑스에서는 시민혁명이 일어나 라인강 왼편을 1815년 빈 조약때까지 무단으로 점령한다.
나폴레옹은 전 유럽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고갔고 이로인해 1803년 신성로마제국은 종말을 구하고, 모든 제국도시,
자치도시, 주교령 도시들이 해산되고 힘있는 왕국에 복속된다 (German mediatisation 이라 부름)
이때 팔츠가의 하이델베르크, 만하임 등도 바이에른 팔츠에서 분리, 바덴 대공국에 복속된다.
하이델베르그 대학도 강 왼편의 건물들은 프랑스에게 넘어가고 오른쪽에 있는 캠퍼스만 유지하는데 바덴의 카를
프레데릭 대공은 대학교를 주립대로 개편, 학교명도 자기 이름에다 설립자이름을 합해 Karl ruprecht 대학으로 개명,
대학 총장을 맡는다.
그는 파괴된 성이 아예 쓸모없다고 여기고 해체할까 고려하고 있었으나 프랑스 공작 Charles de Graimberg 는 이 성을
보존하고자 바덴정부에 항의하고, 성을 있는 그대로 보존할 가치에대해 역설한다. 그러던 중 독일 국민정서가 파괴된
성이 반 나폴레옹 운동을 일으키는 애국심의 결집역할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Charles de Graimberg 이 성에대해 자료를 수집하고 성 투어 패키지를 마련하여 최초로 성 투어를 실시한다.
그는 사무실을 오픈해서 성 투어 뿐만 아니라 성 유지보수를 계획하고 여론을 형성해간다.
결국 그의 사후 1890년에 이르러 전문가들로 구성된 성 재건 위원회가 구성되어 재건에대해 일을 시작하는데
결론은 기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재건은 불가하며 국민정서도 재건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파괴된 성은
그대로 보존해 두기로 결정한다. 단 불에 탄 내부 인테리어만 52만 마르크를 들여 복구했다.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1880년 이 성을 둘러보고 A Tramp Abroad 란 기행문을 쓰기도 하고 1900년대 들어서서
하이델베르크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관광명소가 된다. 일본 관광객들을 비롯해 미국, 유럽에서 한해 평균 300만명
이상의 관관객들들이 이 파괴되어 오히려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로맨틱한 성을 보러 오고 있다,